성경주석 - 베드로전서 4:1~11 호크마 주석


성 경: [벧전4:1]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본(本)을 강조하고 있다. '육체의 고난'은 문자적으로 '육체 안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의미로(KJV, RSV, NASB) 그리스도께서 '육의 생활영역'에서 죽기까지 고난받으셨음을 시사한다(3:18, Michaels,Stibbs, Blum).
󰃨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 '갑옷'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플리사스데'(*)는 '무기'를 뜻하는 '호플론'(*)에서 유래된 단어로 여기서는 전장(戰場)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현세의 삶 속에서 사상이나 이념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Lenski).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갑옷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온유했던 대속적인 마음을 의미한다(빌 2:5, Cranfield).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속에서 고난당하시는 가운데 가지셨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Kelly)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다(Calvin, Bigg, Selwyn, Michaels, Blum).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의 유혹과 권세가 이기지 못하여 죄가 끊어지게 되며(롬 6:8, 11)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성화의 한과정을 경험하게 된다(Selwyn, Cranfield, Stibbs).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의 동참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함으로 죄의 권세가 지배할 수 없는 성화의 삶을 영위하도록 권면한다.

성 경: [벧전4:2]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그후로는...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을 제시한다. '육체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사르키'(*)는 '육체 안에서'라는 의미로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지상 생활을 나타낸다. 한편 '남은 때'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생명이 남아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 사람의 정욕을 좇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 '사람의 정욕'과 '하나님의 뜻'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사람의 정욕'의 헬라어 '안드로폰 에피뒤미아이스'(*)에서 '안드로폰'은 본서에서 한번을 제외하고는(3:4)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6절;2:4, 15), '에피뒤미아이스'는 단순히 성적인 욕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모든 죄악된 욕망을 의미한다(요일 2:16, Selwyn, Michaels).한편 '하나님의 뜻'은 문맥상 죄를 그치고(1절) 부끄러운 죄악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2, 3절). 비록 베드로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지만, 본서 내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왕을 공경하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19절; 2:15,17;3:17).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타락된 본성에서 비롯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

성 경: [벧전4:3]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너희가...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 - 본절은 수신자들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삶에 대한 묘사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삶은 과거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으로 족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방인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본절의 '뜻'의 헬라어는 '불레마(*)로 2절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뜻'(*, 델레마)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불레마'는 확고한 목적성이 없어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처럼 변하기 쉬운 것을 가리키며 '델레마'는 목적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뜻을 가리킨다(Caffin). 한편 '행한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이르가스다이'(*)는 완료 분사로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전부 이방인 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수신자들은 더이상 과거 이방인의 삶과 동일한 죄악된 삶을 영위할 이유가 없다. 죄악된 삶은 과거 이방인 시절로 족한 것이다. 베드로는 경고하기 위해서 과거 수신자들이 저지른 세 가지 부류의 죄악을 열거한다. (1) 음란과 정욕 - 본문은 성(性)과 관계된 죄악이다. '음란'은 절제되지 않은 지나친 정욕으로 인한 부도덕한 성행위를 가리키며.'정욕'은 사악한 욕망들이 내적으로 감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 '정욕'은 '음란'으로 향하게 된다(2절;2:11). (2)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 - 본문은 '술'과 관계된 죄악이다. '술취함'의 헬라어 '오이노플뤼기아이스'(*)는 '포도주'라는 뜻의 '오이노스'(*)와 '솟아 오르다'라는 뜻의 '플뤼오'(*)의 합성어로서술에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방탕'은 술취한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것을 의미하며 '연락'은 '큰 술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술이 만취 되었을때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쉽게 범죄하게 된다. (3) 무법한 우상 숭배 - '무법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데미토이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허락하다'라는 뜻의 '데미토스'(*)가 합성된 말로서 자연과 양심의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음주와 음란이 섞인 가증스러운 것이었다(왕상 21:26; 겔 7:20; 롬 2:22). 그 결과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기억지 못하게 되고 그분을 떠나 허탄한 우상에 빠져버리게 된다.

성 경: [벧전4:4]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이러므로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이러므로'의 헬라어 '엔 호'(*)는 본서에서 다섯 번 나타나며(1:6; 2:12; 3:16,19) '이러한 생활 안에 있으므로'를 의미한다.이것은 한때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삶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상히 여겨'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존타이'(*)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크세노스'(*)에서유래된 말로 '낯선 사람처럼 보이다'라는 의미이다(행 10:6, 18;17:20). 이방인들은과거에 자신들과 같은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Bigg). 이러한 모욕과 비방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아니하는 것을 - 본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비방하는 이유이다. '극한'(*, 아소티아스)은 자기 자신을 무모하게 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눅 15:13). 그러므로 '극한 방탕'은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며 방종한 생활에 버려둠으로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생활을 말한다(엡 5:18; 딛 1:6). 이방인들은 과거에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아 전혀 다른 새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다고 비방한다.

성 경: [벧전4:5]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 본래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던 심판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주셨다(요 5:22,27; 행 17:31; 롬 2:16).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해서 마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자들을 말한다(살전 4:15). 여기서 '죽은 자'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는 '마땅히 심판하시는 자'를 표현한 것으로 심판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 경: [벧전4:6]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본절에 '이를 위하여'(*)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심을 가리킨다(Selwyn).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자'의 '심판주'가 되시기 위해서 '죽은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죽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Augustine, Frasmus, Luther)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성이 없다. 왜냐 하면 앞절에서 육체적으로 죽은 자에 대해 이미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Stibbs). 따라서 본절의 '죽은 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하기 전에 죽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Dalton, Kelly, Moffat, Selwyn,Cranfield).
󰃨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는 '육체로'와 '영으로'를, '심판을 받으나'와 '살게 하려 함이니라' 대조시켜서 본절이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 목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심판을 받으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도시(*)는 부정 과거로 육체로는 세상에서 이미 심판을 당하였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살게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조시'(*)는 현재형으로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아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으로는 영원히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복음은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하는 능력으로(요일 3:14)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할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복음이 제공하는 생명력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수 있다.

성 경: [벧전4:7]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 '만물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3:10, Stibbs). '가까왔으니'의 헬라어 '엥기켄'(*)은 '가까이잡아 당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엥귀스'(*)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임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네사테'(*)는 '소리'라는 뜻의 '소스'(*)와 '마음'이라는뜻의 '프렌'(*)의 합성어로서 '올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을 의미하며 '근신하여'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성 경: [벧전4:8]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 에크테네)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벧전4:9]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대접하기를'의 헬라어 '필록세노이'(*)는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와 '나그네'를 의미하는 '크세노스'(*)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풀다'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다(딤전 3:2; 5:10; 딛 1:8).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쫓겨다니면서 전도 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자들이 많았기때문이다(Lenski, Cranfield). 따라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여서 사도들은 자주 이 덕에 대해서 언급하였다(롬 12:13;히 13:2; 요삼 1:5-8). 한편 베드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조건으로 '원망없이'할 것을 권면한다.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에 겨울 수도 있었으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불평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25:35, 38, 40).

성 경: [벧전4:10]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다양하다(롬 12:6;고전 12:4).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할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 비교되거나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고전 4:7)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Cranfield).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해야 한다. 이 '봉사' 는 '상대를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 본절은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통해 서로 섬겨야하는 자세를 나타낸다. '각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킬레스'(*)는 여러 가지 특색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은 한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고 각 사람마다 다양한 종류의 은사를 허락하셔서 각 사람이 서로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여 필요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신다. 한편 '청지기'는 본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양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청지기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멋을 추구해야 한다(Robertson, Blum).

성 경: [벧전4:11]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베드로는 본절에서 은사의 사용 범주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 첫번째 범주는 '말의 사용'이다. 여기에서 '말하려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랄레이'(*)는 모든 종류의 말을 의미하며 '말씀'의 헬라어 '로기아'(*)는 하나님의 입에서나오는 말씀으로 계시를 의미한다(Blum ). 그리스도인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처럼 즉 성경 말씀처럼 해야한다(고후 5:20; 살전 2:13).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표본 삼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함을 시사한다(Lenski).
󰃨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 둘째범주는 '봉사'이다. 베드로는 봉사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다 열거하지 않고 한 단어로 묶고 있다.'공급하다'의 헬라어 '코레게이'(*)는 본래 '합창하다'라는 의미였으나 후에 '하나님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해야 한다(Calvin).
󰃨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니 -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앞서 언급한 두가지 범주 즉 말과 봉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은사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전영역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행해야만 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 인해서 가능한 것임을 암시한다(Beare).
󰃨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본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영이다(롬 11:33-36; 엡 3:20, 21). '그에게'의 헬라어 '호 에스틴'(*)은 선행사가 예수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인지 분명치 않으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Stibbs, Michaels, Kelly, Goppelt, Selwy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광'이란 의미가 되어 논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논리상 타당하므로 본절에 해당하는 선행사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Blum, Clement).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고 영광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연결되기 때문에(롬 16:27; 유 1:25; 계 1:6, Lenski, Robertson) 찬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의미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으며 아마도 베드로도 대상을 구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송영이 이곳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원래 본절이 독립된 것이었는데 삽입된 것으로 주장하나(Clement)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위엄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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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카르타 한국교회
Jogja Korean Community Church
족자카르타 한국교회는 한국인 교포, 유학생, 여행자 뿐만 아니라 한국어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인도네시아인들과 함께 하는 개혁주의 신앙 위에 세워진 말씀과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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