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주석 - 베드로전서 3:8~22 호크마 주석


성 경: [벧전3:8]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2:18-3:7에 있는 명령을 마무리하면서 5개의 형용사를 사용함으로 완곡한 권면을 하고 있다. 본절에 사용된 5개의 형용사는 동일하게 분사적인 용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특별한 계층으로 부터 신자의 특성으로관심을 옮긴 것으로(Goppelt, Selwyn) 신자의 상호 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 마음을 같이하여(*, 호모프로네스) - 이것은 '같은'을 뜻하는 '호모스'(*)와 '마음'을 의미하는 '프렌'(*)의 합성어로서 '한가지 일에 뜻을 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일한 의견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가 서로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가지며 영적인 끈으로 연합되어야 함을 시사한다(행 4:32, Michaels).
󰃨 체휼하며(*, 쉼파데이스) - 이것은 '함께'를 뜻하는 '쉰'(*)과 '고통을 받다'에 해당하는 '파스코'(*)의 합성어이다. '쉼파데이스'의 직접적인 의미는 '동정심을 갖다'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참여하여 고난 받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동정하는 것을 나타낸다(히 10:34).
󰃨 형제를 사랑하며(*, 필라델포이) -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필라델포이'는 '사랑'에 해당하는 '필로스'(*)와 '형제'에 해당하는 '아델포스'(*)의 합성어이다. 이는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결속시키는 형제애로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윤리적 덕목이다(롬 12:10; 살전 4:9,10; 히 13:1; 벧후 1:7).
󰃨 불쌍히 여기며(*, 유스플랑크노이) - 이것은 '좋은'의뜻을 가진 '유'(*)와 '마음'을 뜻하는 '스플랑크논'(*)의 합성어이다. '유스플랑크노이'는 히포크라테스 당대에 '내장이 강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의미가 변화되어 '용기 있는'이나 '인정 많은'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Selwyn).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나 동정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고후7:15; 몬 1:7, Bigg).
󰃨 '겸손하며'(*, 타페이노프로네스) - 이것은 '겸손한'의 의미를 가진 '타페이노스'(*)와 '마음','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렌'(*)의 합성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가지셨던 마음으로(잠 29:23;빌 2:6-9) 낮은 마음을 나타낸다.

성 경: [벧전3:9]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 베드로는 본절에서 일반적인 불신자와의 관계를 말함으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해치고 욕하는 자에게도 보복하는 일이 없이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교훈이다(눅 6:27-29; 23:34). '갚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디돈테스'(*)는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아포디도미'(*,'지불하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복을 빌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군테스'(*)는 저주의 반대말로 '좋게 말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악이나 욕으로 갚아도 될 만한 상황 속에서라도 저주나 앙갚음을 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고 중보 기도해야 함을 시사한다(Blum).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히나'(*, '...을 위해서')로서 목적절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히나'는 목적절로 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목적절로 해석하면 복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려고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복을 빌어야 한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복을 빌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Lenski,Bengel, Blum).

성 경: [벧전3:10]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 본절은 시 34:12-16을 인용한 것이다. 본래 시편에서는 '생명'과 '좋은 날'이 이 세상과 관련된 표현이나 베드로는 본절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그 의미를 종말론적 차원까지 확대하고 있다(Blum). 즉 베드로는 '생명'이 단순히 '이 세상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망인 영생을 지칭하는 것으로(Michaels), '생명을 사랑하고'는 7절의 '알아'와 연결되어 단순히 생명을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깨달아서 그 목적에 맞게 소망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다(Lenski). 한편 '좋은 날'은 시편 기자가 '이 세상의 아름답고 즐거운 날'로 묘사했으나 본문은 장차 올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Beare, Kelly)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날'을 가리킨다(1:8). 이렇게 영생을 소망하고 사랑하며 다가올 세계를 기다리는 자는 곧 그리스도인이다.
󰃨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맡하지 말고 - 영생을 사랑하고 다가올 세계를 간절히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약 3:6). '궤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론'(*)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것을 삼가하며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화평은 세상에 목표를 두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이루어진다.

성 경: [벧전3:11]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 '떠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클리나토'(*)는 문자적으로 '돌아서라'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악에서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가운데 선을 행해야한다(Tasker).
󰃨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리 - 본문은 시 34편에서 인용한 듯하다(Goppelt,Michaels). '화평을 구하는 것'은 서로를 세워 주는 것이며(딤후 2:22), 현실적인 삶에 순응하여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삶이다.이런 '화평'은 상대가 불신자든(롬 12:18) 특별히 그리스도인이든 간에(고후 13:11; 살전 5:13)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윤리적 덕목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붙잡아야 할 것이다.

성 경: [벧전3:12]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 '주'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Michaels) 시 34:15,16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lum, Stibbs). 한편 '눈'은 항상 자신의 섭리에 따라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감찰하심을 의미하며(출 2:25) '귀'는 자신이 백성의 필요한 간구를 들으심을 의미한다(출 3:7).
󰃨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 '주의 낯'은 하나님께서 악행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진노의 모습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표현이다(Blum). 한편 '향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는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1) '넘어서'(over). (2) '대항하여'(against). 두 가지 의미 중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들이나 동일하게 향하시나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넘어 가시며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악한 자를 대적하여 진노하시기 때문이다(시 34:16).

성 경: [벧전3:13]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 '열심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타이'(*)는 '뜨겁게 하다' 혹은 '타는 듯하다'의 뜻을 가진 '젤로오'(*)에서 유래된 말이며, '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코손'(*)은 '나쁜'이라는 뜻의 '카코스'(*)에서 나온 말로서실제로 '상처를 내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또한 그의 귀가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므로 열정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전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절은 유대주의적인 표현으로(시 56:4; 118:6; 마10:28; 롬 8:31, kelly)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절은 육체적인 것은 해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영혼까지는 해칠 수 없으며(마 10:28), 그들이 믿음의 사람에게 육신적으로 해를 가한다고 할지라도 묵묵히 참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승리가 보장됨을 시사한다.

성 경: [벧전3:14]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 헬라어 본문에서 '고난을 받으면'은 실제로 일어날 확실한 박해를 암시한다(Robertson).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마 5:10)이 베드로가 인용한 것이다(Michaels). 한편 '복있는 자'(*, 마카리오이)는 베드로가 자신의 서신에서 잘 쓰는 단어 형태로(4:14) 이러한 복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 속할 기대를 가지고 견뎌내는 자가 갖는 것으로 미래적인 것이다(Blum). 따라서 본문은 수신자들이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순간을 견디어이기면 축복의 영광을 소유할 것임을 시사한다.
󰃨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 본절은 사 8:12의 인용이다. 70인역은 '저희에 대한 두려움'로 잘못 이해하여 '앗수르 왕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하였으나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톤 포본 아우톤'(*, '그들의 두려움을')으로 '그들의 두려움을 두려워 말라'로 해석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어떠한 상황하에서든지 주께 헌신한 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서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Calvin).

성 경: [벧전3:15]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 본절은 사 8:13의 인용이다. 사 8:13에서 '주'는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이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온 톤 크리스톤'(*)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퀴리온' 앞에 관사가 없으므로 서술격으로 해석되어 '그리스도를 주로서'라는 의미이다(Christ as Lord,NIV,RSV). (2) '퀴리온'과 '톤 크리스톤'을 동격으로 '주, 즉 그리스도를'이라는 의미이다(Bigg, Micha6els, Selwyn). 한편 '거룩하게 하고'의 헬라어 '하기아사테'(*)는 그리스도를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나타낸다(Michaels). 그리스도인은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불러주신 거룩하신 분, 그리스도를 알려야 한다(1:15,16; 2:9b).
󰃨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소망이라 함은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소유하는 기대이다(1:3,21;롬 4:18; 엡 2:12).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두고 소망을 가진 자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될 수 밖에 없으며 비그리스도인들은 그 점에 대해 의아해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수호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답'에 해당하는 '아폴로기안'(*)은 본래 재판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변호할 때 사용되어진 용어이다(행 22:1; 25:16). 본문에서 법정 용어가 사용된 것은 공식적인 대답의 요건을 갖추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대답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헬라어 본문에는 '알라'(*, '그러나')가 본문앞에 삽입되어 있다. 베드로는 '알라'를 사용하여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온유'의 헬라어 '프라위테토스'(*)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이며(딤후 2:24,25)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2절; 1: 17;2:17, Blum).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변론하는 과정에서자기 주장이나 감정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합당한 진리만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Stibbs).

성 경: [벧전3:16]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선한 양심을 가지라 - '선한 양심'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아가는데에서 생기는 자유와 담대함과 관련된다(행 24:16; 딤전 1:19, Michaels, Blum). 이러한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들이 변론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근거이다. 아무리 논리에 맞는 대답과 설득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만약 양심이 선하지 않다면 복음에 대해서 올바로 증거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만다.
󰃨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함이라 - '욕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레아존테스'(*)는 '모욕하다'를 뜻하는 '에페레아조'(*)에서 유래된 말로서 '정신적으로 학대하다'라는 의미이다(Robertson).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과 깨끗한 행동을 보일 때 그를 모욕하고 핍박하던 자들의 거짓이 드러나 오히려 그들이 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벧전3:17]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 이 구절은 2:20과 같은 구조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특별히 '선을 행함'(*, 아가도포이운테스)과 '악을 행함'(*, 카코포이운타스)이 병행 구절로 되어 비교되고 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행한 악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부끄러움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고난받는 자들을 축복하신다(2:15,19,20; 4:13,14; 골 1:24, Stibbs, Blum).그러므로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성 경: [벧전3:18]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죽으사'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에파덴'(*, '고난당하였다')로 되어 있으며(B.K.P) 어떤사본에서는 '아페다넨'(*, '죽었다')으로 나온다(*,A.C). 여기서 어떤 것을 취한다 할지라도 의미에는 변화가 없으나(Blum) 2:21과 4:1의 연관성으로 보아 '에파덴'으로 보는 것이 탸당한 듯하다(Caffin, Lenski). 한편 '죄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하마르티온'(*)은 '죄에 관하여','죄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속죄제의 희생을 나타낼 때 쓰인 어구이다(레 5:7; 6:20;겔 43: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로서, 그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드린 대속적인 죽음이었다(Bigg)
󰃨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의인이시지만 죄를 지은 불의한 인간을 위하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사 53:5,6, 11,12)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셨다(Blum). '대신하셨으니'의 헬라어 '휘페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되는 목적절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목적을 나타낸다. '인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사가게'(*)는 본래 법관 앞으로 데려오거나궁전 앞으로 데려올 때 사용된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깊이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로사가게'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나(히 6:20) 희생 제물과 관계가 없으며(Selwyn, Kelly, Goppelt). 어두움에서 빛으로, 우상에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개종의 경험과 연관된다(Michaels, Stibbs).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하였다.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본절은 '죽으심'과 '부활', '육신'과 '영'이 대조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헬라에서는 물질과 영을 나누어서 해석하는 방법이 유행하였으나 본절의 '육체로는'의 헬라어 '사르키'(*)와 '영으로는'의 헬라어 '프뉴마티'(*)는 도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아니라 영역을 나타내는 여격이다. 따라서 '육'과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육'은 인간적인 생명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를 '영'은 부활하신 생명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selwyn, blum, Dalton, Michaels).

성 경: [벧전3:19]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 본절은 해석상에 있어서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 있는 영은 누구인가? 만약 영을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전파하셨는지, 아니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파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다면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전파하셨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1) 혹자는 '에녹의 영'이 음부에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파했다고 주장한다(Nestle, Harris, Moffatt, Goodspeed). (2) 혹자는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부활하기까지의 동안에 노아의 홍수 때 멸망하여 음부에 갇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파했다고 주장한다(Bigg, Hunter).(3) 혹자는 그리스도가 성육신 전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당시의 패역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도했다고 주장한다(Jerome,Augustine, Aquinas).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의 '옥'은 이 세상은 의미한다. (4)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도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Blum, Dalton,Kelly). 이러한 견해들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20절; 1:10,20; 벧후 2:5).

성 경: [벧전3:20]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 1세기 때에 묵시 문학에서 노아의 홍수는 종말에 오는 심판의예표로 종종 이용되곤 하였다(마 24:37-39; 벧후 3:3-10). 또한 신약 시대에 와서 노아 시대의 홍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로 비유된다(21절). 그래서 홍수 가운데 방주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보존된 '의의 상징'이었다(히 11:7). 반면에 홍수에 멸망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그리되었다. 하나님은 '방주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창 6:3; 롬2:4; 벧후3:9)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방주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여기서 '방주'는 '교회'에 대한 상징으로(Justin, Tertullian) 노아 시대에 120년을 기다리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벧후 3:9).
󰃨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겨우 여덞 명이라 - '물로 말미암아'(*, 디 휘다토스)는 '물을 통하여'라는 의미이며 '방주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에이스 헨'(*)은 '방주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방주 안에 들어간자들이 물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음을 시사한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았지만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이 안전하게 방주를 밀어올림으로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를 통한 구원을 상기시켜준다. 한편 '여덟 명'이란 숫자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불과 소수만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특히 고난을 받은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Kelly).

성 경: [벧전3:21]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맘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 노아의 가족을 구원한 물은 침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침례의 형태에 참여한 것을 곧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참여하여 연합되어야 얻을 수 있다.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는 표시이다. 실제로 노아 홍수때의 물은 침례시의 물의 '실체'(*, 안티튀폰)이고 침례 때의 물은 '표상'(*, 튀포스)이다(TDNT).
󰃨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 본문은 침례의 중요성을 배제시키려고 함이 아니다. 단지 침례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로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혹자는 '육체의 더러운 것'에 나타난 소유격을 주격으로 보아서 '육체가 더러움을 제거함으로'라는 의미로 보나(Bengel) 침례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까닭에 심령의 죄를 씻어내는 것이다(히 10:22).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

성 경: [벧전3:22]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 그리스도께서 고난 후에 승귀하여 영광의 자리에 계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오르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류데이스'(*)는 19절에서 사용되었던 분사로서 계속적인 승리의 전진을 나타낸다(Stibbs).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권세와 모든 피조물로부터 존귀를 받으시는 영광 중에 거하신다(시 110:1; 롬 8:34).
󰃨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존재들 즉 '천사'와 '권세', 그리고 '능력'은 강력한 힘을 지닌, 선한 천사나 악한 천사의 구별없이 영적 세력을 의미한다(롬 8:38; 고전 15:24; 엡 1:21) 이들은 영적 존재로서 일시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결국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온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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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카르타 한국교회
Jogja Korean Community Church
족자카르타 한국교회는 한국인 교포, 유학생, 여행자 뿐만 아니라 한국어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인도네시아인들과 함께 하는 개혁주의 신앙 위에 세워진 말씀과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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