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주석 - 마태복음 6:25~34 호크마 주석



성경 주석 - 마태복음 6:25~34 호크마 주석


성 경: [마6:25]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그러므로(*, 디아 투토) -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로써'란 뜻으로서 본절에 언급될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을 버려야 할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음을 가리킨다. 즉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했을 때 발생할 세상 염려에 대한 지침(指針)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의 절대적 권위릍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서 그 가르치는 바가 세상의 어떤 진리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참 진리임을 시사하고 있다.
󰃨 목숨을 위하여( , 테 퓌스케 휘몬) - '목숨'으로 번역된 '퓌스케'는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이 '퓌스케'는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10:28).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물질적인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야 하는 것이다.
󰃨 염려하지 말라 - 이는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시사한 바 있는 세상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염려'(*, 메림나오)란 '분열되다', '나뉘다'는 뜻의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뜻한다. 실로 이러한 염려의 늪에 빠지게 된 자는 생(生)에 있어서 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고민하여야 할 대상은 물질적인 문제에 앞서 먼저 영적인 문제여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분열되어 영적인 문제를 망각(oblivion)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 음식은 생명체의 존속에 필요한 소모품(consumption goods)이다. 따라서 음식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생명 그 자체보다는 목숨에 소용되는 음식물에 집착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때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준 이상, 이에 필요한 음식과 옷은 우리에게 당연히 주실 것이다.

성 경: [마6:26]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공중의 새를 보라 - 누가의 기록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새'라는 말 대신에 '까마귀'로 언급된다(눅 12:24). 본문의 '공중의 새'란 순수한 히브리 문학적 표현으로서 '하늘을 날으는 새', 곧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생명체를 상징한다. 한편 본문의 '보라'(*, 앰브려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있다.
󰃨 심지도 않고 - 새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거두지도 않고 - 이 말씀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새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다 먹이를 떨어뜨려 주시도록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거두지도 않고'란 말은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고민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 이는 성경적 우주론(宇宙論)을 전제하고 있는데, 우리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떨게 해결해 가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 어떠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 창조 세계를 질서있게 경영하고 계시며 따라서 이 자연계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천부'에 관해서는 5:16 주석을 참조하라.
󰃨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하나님은 모든 자연계 피조물의 창조주이시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선자는 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귀하다'(*, 디아페로)란 말의 원뜻은 '다르다', '구분된다'로서 새와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보다'로 번역된 바로 앞의 혤라어 '말론'(*)은 '심히', '대단히'라는 뜻인 '말라'(*)의 비교급 부사로서 '훨씬 더', '더욱'이라는 강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로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존재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법칙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 이면(裏面)에 담겨있는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뜻까지도 포착(capture)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6:27]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그 키를(*, 텐 헬리키안 아우투) - '키'로 번역된 '혤리키안'은 '신장(身長)의 길이'나 '생명의 길이' 모두를 뜻할 수 있다. 키를 '한 자'(*, 펙쿠스 헤나; 한 팔 길이로서 히브리인들의 '규빗'과 비교될 수 있다)나 더 한다는 것은, 신장의 길이를 나타낼 때는 약 8인치 가량 늘인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생명의 길이를 뜻할 때는 나이를 더 먹는다는 뜻이 된다. 현대 주석가들은 이를 생명의 길이, 곧 나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어느 누구도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목숨의 연장(延長)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성 경: [마6:28]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의복을 위하여 -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 들의 - 이 말은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아마 이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있다.
󰃨 백합화(*, 타 크리나) - 원어 '크리나'는 백합화 뿐만 아니라 아네모네,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을 포함하는 말인 것 같다(Robertson). 즉 '들의 백합화'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wild flower)들을 대표하는 꽃으로 볼 수 있다.
󰃨 생각하여 보라(*, 카타마데테) - 26절의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 '엠브려파테'란 말이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 븐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 수고도 아니하고 - 공중의 새들이 먹을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성 경: [마6:29]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솔로몬의 모든 영광 - 원문은 솔로몬이란 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솔로몬 조차도'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제 3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고 가장 훌륭한 궁궐에서 그 영광의 극치(極致)를 누렸다.
󰃨 입은것이...못하였느니라(*, 우데 페리에발레토) - 이 말은 헬라어 중간태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기 자신을 입히지 못하였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 이 꽃 하나만 - 아름다운 백합화의 그 자연스럽고 찬란한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도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그 어떤 디자이너도 그와 같이 꾸밀 수 없는 조화롭고도 완벽한 치장이다. 왜냐하면 꽃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범칙이 숨쉬고 있으며 신적(神的)인 기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 경: [마6:30]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오늘 있다가(*, 세메론 온타) -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 아궁이에(*, 에이스 클리바논) - 아궁이로 번역된 '클리바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 던지우는 -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 들풀(* 톤 콜톤 투 아그루) -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어 '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즉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리고피스토이) -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6:3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무엇을 먹을까...입을까 하지 말라 - 25절과 맥을 같이 하는 명령으로서 특히 본문의 '하지 말라'는 말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표현되어 '조그만치도 염려하지 말라'는 절대 금지(禁止)를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무가치해 보이는 극히 작은 것이라도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이상의 말할수 없는 풍부하신 관심으로 신자들을 돌보고 계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굶지나 않을까 헐벗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을 온전히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염려는 당신 백성들의 요구를 미리 아시며(8절) 풍족히 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성 경: [마6:3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 - '이방인들'이란 하나님 나라의 의(義)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면서 오직 먹고 마실 것만 추구하는 자들을 통칭한 맡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 또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세상적 염려와 근심에 쫓기고 있다.
󰃨 천부께서...아시느니라 - 신자가 세상일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될 이유가 본절에서 몇 가지로 제시되었다. 그 첫번째는 앞에서와 같이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이방인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크나큰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아심'은 단순한 지적 인식(recognition)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를 채워주되 넉넉히 채워주시는데까지 미치는 완전하고도 전인적인 인식을 뜻한다(8절).

성 경: [마6:3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며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稱義)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께서 줄곧 강조해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 '먼저'(*, 프로톤)는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과 세상적 노력이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정녕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히 선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결국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듯이 포부(aspiration)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곧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그것이다. 제 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Stott, Sermon on the mount, p. 172).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는가?
󰃨 이 모든 것(*, 타우타 판타) - 이 어구의 강조점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판타'에 놓여져 있으며, 이는 언급한 전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필요로하는 모든 종류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포부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peace)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 조건을 충분히 채우시겠다는 의미이다.
󰃨 더하시리라(*, 프로스테쎄세타이) - 오리겐(Origen)은 본문에 관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고 말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우리들 마음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양식이어야 하며, 신자들은 이방인의 염려의 대상인 먹을 것, 마실 것에 지배받지 말고 아버지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는 만큼 주실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고 추구한 모든 것 위에 '덤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딤전 4:8).

성 경: [마6:3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내일 일을 위하여(*, 에이스 텐 아우리온) -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언제나 다시 다가오며 따라서 내일의 문제는 결코 오늘 다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의 은혜는 오늘에 족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면 새로운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암시(hint)하셨다. 즉 내일의 염려는 내일의 새 은혜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 한 날 괴로움 - 여기서 '괴로움'(*, 카키아)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적 견지에서 본 '악'을 뜻하나 본문에서는 윤리적 측면의 '죄악'을 뜻하지 않고 인간이 감내(堪耐)하기 힘든 고초, 역경 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말은 가끔 우박으로 인해 수확물을 몽땅 잃어버리는 등의 절망적 재해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70인역(LXX)은 히브리어 '라아'(*)를 '카키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라아'는 '악한', '불운한', '곤고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 날 괴로움'이란 우리의 현실에서 각 날(日)들에서 마주치는 온갖 어려움이라고 해석할 수있다.
󰃨 족하니라(*, 알케톤) - 그 날에 주어진 것은 그 날의 고통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같은 원리, 즉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야 하는 내일에 대한 원리는 결국 염려의 근원적 치유(healing)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넘치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실로 내일 일의 염려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기울여야 할 관심은 오늘로서 끝나야 할 것이며 내일의 불행과 고난(distress)은 오늘 앞당겨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b. Sanhedrin 100b;b. Berakoth 9a). 한편 본문의 교훈적 말씀을 살전 5:16-18과 비교해 볼 때, 이는 단순한 권면과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염려 자체가 불신앙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 '내일'의 주인은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 은혜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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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카르타 한국교회
Jogja Korean Community Church
족자카르타 한국교회는 한국인 교포, 유학생, 여행자 뿐만 아니라 한국어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인도네시아인들과 함께 하는 개혁주의 신앙 위에 세워진 말씀과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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